대전광역시 대전광역시

검색하기

이전 슬라이드 보기

다음 슬라이드 보기

근대의대전

  • 근대사회의 성장
  • 19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서양세력이 위협을 가해 오는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맞았다. 이러한 때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재확립을 꾀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웠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대응하여 강경하게 맞섰으나 국내 외 정세의 변동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촉진되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계속되면서 조선의 농촌사회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외세의 침투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들은 정치의 개혁을 주장하고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1894).

    같은 해 3월 하순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자 북접의 충청도 동학교도 수천명이 보은 청산을 떠나 공주목과 진잠현의 경계인 성전평(星田坪, 지금의 유성구 성전동)을 점거하고, 5월 13일에는 황토현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 회덕을 습격한 다음 다시 진잠에 모였다. 이때 모인 동학교도는 충청도의 교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가운데 공주목, 회덕현, 진잠현 등지의 동학교도도 이에 합세하였다.

    진잠에 모였던 동학농민군은 일단 해산한 다음, 동학농민군이 제2차로 궐기하여 북상할 때 우금치(공주)전투에 다시 참여했지만 일본군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농민이 주축이 되어 외세에 대항하고 근대사회로 전진하는 계기를 만든 대규모의 근대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정부는 갑오개혁을 추진하여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지향하였다. 갑오개혁에 이어 을미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일본의 침략적 간섭이 심했으므로 국민들의 반발이 컸다. 특히 명성황후가 시해된 데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던 국민들은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러한 국민들의 움직임은 일본의 침략세력을 막아,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항일의병운동으로 나타났다.

    항일의병은 을미사변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을미의병의 최초 진원지는 대전의 유성·회덕 지방이다. 공주·진잠·회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잠현감을 지낸 문석봉(文錫鳳)이다.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의 장대(지금의 유성구 장대동)에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선봉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에 오형덕(吳亨德), 군향에 송도순(宋道淳) 등 지휘부를 조직하고 대전지방에서 의병을 모았다. 이때 좌의정을 지낸 회덕의 사족 송근수는 진잠에 거주하던 신응조와 함께 의병항쟁을 지원하였다.

    유성의병의 공격 목표는 공주목이었다. 이에 따라서 유성의병은 먼저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00여명의 의병은 유성 장대리로 돌아와 주민들의 의병참여를 독려하였다. 10월 21일에는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에게 동참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같은 달 28일 공주의 공암을 거쳐 공주목으로 진격하였다. 유성의병은 공주의 와야동(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에서 관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무장이 열세했던 의병진은 이 전투에서 패했다.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유성·회덕·진잠 등 대전지방의 사민들에 의하여 전개된 항일투쟁이다. 이 사실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이 지방에서 반침략 의병투쟁이 있었음을 최초로 알려주는 사실이다.

    서양의 근대 문물이 들어오고 열강의 세력이 침투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의 근대시설이 갖추어져 갔다. 근대적인 통신·교통·의료시설이 마련되면서부터 우리의 문화 수준이 향상되어 갔다. 그러나 근대 시설이 우리의 자주적인 의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해서 또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마련되어 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일본은 대륙을 침략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신의주를 잇는 간선인 경부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1898년 9월에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1900년 3월에 노선이 확정되고 다음 해 6월에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공사를 착수했다. 대전은 경부철도의 중요한 통과지점이었고 공사를 진행하는 중요한 기지이기도 하였다.

    1904년 6월에 대전역이 세워지고 같은 해 11월 10일 경부철도가 준공되어 다음 해 5월 25일에 개통되었다.

    1900년대 초 경부철도의 부설로, 대전은 오랜 전통을 지닌 한가한 농촌의 모습에서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는 신흥도시로의 발전이 약속되었다.

  • 일제강점하의 대전
  • 1930년대 대전역 전경사진

    1904년 초 경부철도의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 공사에 참여하는 일본인이 대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에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수비대의 설치, 한성 영사관 경찰대전순사 주재소, 대전역, 대전 심상소학교(1906년, 구 원동학교의 전신) 등 낯선 시설이 들어서고, 일본인 거류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살지 않는 원동, 중동, 정동 등 대전천의 낮은 지역에 주거지를 형성하였다. 대전은 경부철도의 개통에 따라 점점 도시로 그 모습이 변하여 갔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신흥도시로 발돋움하던 대전지방은 오랫동안 공주·회덕·진잠 등의 지역을 포괄하는 몇 개의 군현 지역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일본인에 의해 추진된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대전군의 탄생을 보았다. 1932년에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지고 1935년에는 대전부로 승격되어 이에 따르는 각종의 관청과 시설이 설치되어 급속한 도시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민족은 일제의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로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마침내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전지방에서 3·1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은 대전장(지금의 인동시장)터다. 산내에 살던 양정길(梁正吉)은 김로원(金魯源)과 함께 3월 6일 인동 장터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용두동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문화동에 있던 보병대가 출동하여 무차별로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군중은 사상자가 나타나 해산되었다. 대전의 3·1만세운동은 그 뒤에도 인동시장을 비롯하여 가수원, 유성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자료 : 최근묵(시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 담당부서 : 문화재종무과
  • 담당자 : 안준호
  • 문의전화 : 042-270-4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