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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대전

대전시전경

국내 외에서 줄기차게 펼쳐졌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리로 우리민족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게 되었다(1945. 8. 15). 그러나 우리민족은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여러 나라는 민주, 공산 양대 진영으로 갈라졌고 그 날카로운 대립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38도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은 자유민주 국가체제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1948. 8. 15).

광복 후 대전지방의 행정구역은 일제 때의 제도를 이어오다가 1949년에 대전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 6·25전란으로 정부가 대전으로 임시천도(1950. 6. 28∼7. 14)를 하였다.

6·25전란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던 대전은 전후의 복구와 급속한 인구의 증가로 중부 지방의 행정, 문화, 경제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도시의 확장에 따라 대전을 둘러쌓던 대덕군이 대전으로 편입되고 1988년에는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95년 지방 자치제의 실시에 따라 대전광역시로 개칭되었다.

광복 이후 대전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6·25 한국동란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대전은 북한의 남침이 계속되어 대구로 옮겨질 때까지 임시수도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금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한·미 양군은 전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대전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또한 북한군의 주요 목표도 대전 공략이었다. 대전 방어를 맡은 미24사단은 북한의 4개 사단에 포위되어 용전하다가 「딘」소장이 행방 불명되고 미군은 후퇴하였다. 「딘」장군의 대전방어에서 얻은 며칠동안이 없었던들 부산의 최종 방어가 위급하였을 정도로 대전전투는 6·25전사에 길이 새겨지는 전투였다.

대전은 6·25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북 5도의 피난민이 이곳에 정착하고 곧 전후의 복구사업으로 전국에서 대전으로 모여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전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골고루 모인 새로운 도시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은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로, 그리고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는 광역시로 중부지방의 중핵 도시로 모든 분야에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특히 1974년부터 건설하여 자리잡은 대덕연구단지는 한국과학기술의 중심으로 대전이 과학도시로 터전하게 하였다. 또한 1998년에 정부대전청사(통계청·조달청을 비롯한 10개의 정부기관이 이전)가 개통됨으로써 대전은 행정도시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대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한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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