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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 역사를 광영케 하며,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오 또한 민족을 위하는 본의라.” -홍범도 대한독립군대장 유고문 중(1919.12)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 때려잡던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8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장군의 귀환 1868~1943


장군의 출전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홍범도 장군. 출생 때 어머니를 잃고 9살에 아버지마저 숨지며 고아로 머슴살이를 전전했는데요. 평양감영 군졸, 금강산 신계사 승려, 북천 제지소 노동자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강원도 깊은 산으로 들어가 산포수가 됐습니다.

하지만 우리 국권을 빼앗으려는 일제가 무력투쟁을 막고자 전국 포수의 총을 압수하자, 1895년 의병에 투신했는데요.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으로 국운이 기울던 1907년에는 700명 규모 의병을 이끌고 강원도 일원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기개를 떨쳤습니다.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장군의 모습


이후 대한제국이 강제 병합되면서 연해주로 거점을 옮긴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 북로1군 사령부장으로 봉오동전투, 이어 10월에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에서 일제 정규군을 유인해 섬멸하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위치를 나타내는 지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가 독립군의 바탕이 되는 간도 일대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키자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군이 동포의 피해를 막기 위해 소련 자유시로 피신했는데요.

하지만 볼셰비키혁명으로 파벌싸움을 벌이던 소련군이 독립군을 공격, 큰 피해를 입고 생존자는 소련군에 강제 편입되며 와해되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이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전쟁국면에 돌입한 소련은 1937년 극동전구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구분이 어렵다는 이유로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조선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는데요.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에서 1943년 75세의 일기로 운명했습니다.  ☞ 홍범도 장군 일대기 자세히 보기


장군의 귀환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2019년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요청으로 본격 추진됐는데요.

이후 지난 16일 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방한과 함께 홍범도 장군의 유해도 봉환, 78년 만에 고국 땅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17일 허태정 대전시장은 홍범도 장군이 안치된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아가 참배했는데요.


17일 국립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유해 안치소를 찾아가 참배하는 허태정 대전시장
[17일 국립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유해 안치소를 찾아가 참배하는 허태정 대전시장]


이 자리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신 영웅의 봉환을  환영한다”며“독립운동에 힘쓴 모든 분들을 예우하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홍범도 장군 추모 뉴스영상 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