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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소장유물
명칭 송여익 묘비(宋汝翼 墓碑)
시대
소재지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출처 대전금석문
작성일 2005-01-26
조회 4214
첨부
상세정보 찬 자 : 鄭光弼 서 자 : 宋麟壽 규 모 : 전체높이 171cm, 비신 높이 89cm, 비신 폭 49.5cm, 비신 두께 11cm 군의 이름은 여익(汝翼)이고 자는 원량(元亮)이고 성은 송(宋)씨니 은진 사람이다. 판원사 대원(判院事 大原)의 후예다. 고조는 생원(生員) 극기(克己)니 그가 호분위 사정(虎賁衛 司正 : 正五品) 유(愉)를 생(生)하고 사정이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 正五品) 순년(順年)을 낳았다. 선비(先 )는 김씨니 안동의 명망있는 씨족인 예문관 직제학 맹헌(藝文館 直提學 孟獻)의 따님이다. 경태(景泰) 갑술(甲戌 : 1454)에 군을 낳았다. 백씨 여해씨(汝諧氏)와 더불어 조년에 학업이 성취되어 성화(成化) 임진(壬辰 : 1472)에 이르러 같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성질과 도량이 온자하고 태도가 단정하고 근엄하였다. 소과에 급제한 사람들에 따라서 교유하니 대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쌍벽(雙璧)이라고 지목하였다. 나이 겨우 30에 풍병(風病 : 고혈압)을 앓아서 5~6년을 치료하여 다 나았다. 그러나 대과와 현달에는 뜻을 끊고 초옥에서 사람의 됨됨을 수양하고 농사에 뜻을 부쳤다. 성질이 또한 순박하고 독실하여 부모를 섬기고 형제에 처하매 다 화평하고 순탄하였다. 부화하고 말단적인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을 가짐에는 한결같이 공손하고 검소하게 하였다. 비록 산업에 대하여 구구하고 악착스럽게 하지는 않았으나 누만금(累萬金)의 재산을 쌓았다. 그러나 스스로를 위하여 쓰지 않고 남을 위하여 쓰는데 기쁨을 느꼈다. 한 고을의 간고한 사람들이 다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다. 또 의약(醫藥)에 밝아서 마을에 환자가 있으면 극력 도와서 살려 주었다. 몸은 비록 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사람을 구제한 공은 많았다. 군의 초취(初娶)는 좌참찬 이훈(左參贊 李塤)의 따님이니 2녀를 두었다. 장녀는 고창 현감 윤추(高敞縣監 尹樞)에게 출가하여 자제 광부(光富)를 낳았고 차녀는 참봉 임세창(參奉 林世菖)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는 승의랑(承義郞 : 서반의 正八品 품계) 김령(金玲)의 따님이니 1남 1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급제(及第 : 文科에 급제한 사람의 칭호) 김정(金淨)에게 출가하였다. 자제 세일(世一)은 기묘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학문과 재능이 있어서 바로 등용되었을 터인데 병술에 병으로 조사하였다. 군의 서랑(壻郞 : 사위) 김정(金淨)의 흉한 죽음을 목견하고 또 어진 자제를 잃어 몇 해를 탄식하다가 무자(戊子 : 1528) 12월 기유에 이르러 굴파(堀坡)의 본댁에서 종(終)했다. 향년이 75년 였다. 명에 가로되 : 사위는 아침에 가고 아들은 저녁에 잠드니 슬프다 늙은 춘(椿)나무가 바람이 안 불어도 시드는구나 물은 굽이굽이 흐르고 있고 산은 높이높이 솟아 있구나 고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 높고 낮은 두 무덤에 뿌려서 주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정광필(鄭光弼)은 짓다. 봉훈랑(奉訓郞)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 文學) 송린수(宋麟壽) 쓰다. <宋恪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