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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윤관 묘비(尹寬 墓碑)
시대
소재지 대전광역시 중구 사정동
출처 대전금석문
작성일 2005-01-26
조회 4463
첨부
상세정보 찬 자 : 李廷龜 서 자 : 金玄成 규 모 : 전체높이 198cm, 비신 높이 147cm, 비신 폭 64cm, 비신 두께 18.5cm 유성(儒城)의 보문산(普文山)에 두 묘가 쌍으로 우뚝 서 있으니 명(明)의 조사(詔使) 한림학사(翰林學士)인 금릉(金陵) 주지번(朱之蕃)이 그 비석에 제목하기를 "충익부도사(忠翊府都事) 삼휴자(三休子) 윤관(尹寬) 부( )한 최씨(崔氏)의 묘"라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윤공(尹公)은 남원(南原)사람으로 자(字)는 율옹(栗翁)이요 삼휴(三休)는 그의 호(號)이다. 어려서 정암(靜庵 : 조광조, 1482~1519)선생에게 배워 복재(服齎) 기준(奇遵 : 1492~1521)과 영천(靈川) 신잠(申潛 : 1491~1554)과 죽창(竹窓) 안정(安珽 : 1494~?)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착함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써 소문이 자자했다. 여러 번 공과(貢科) 시험에 합격하여 비록 이룬 바는 없어도 사람들이 원대함으로 기약했다. 기묘(己卯 : 1519)년에 친우들이 다 화에 걸렸는데 공은 마침 상중(喪中)에 있어서 화를 면하니 이로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두문불출(杜門不出 : 집에만 있고 사회의 일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음)하여 스스로 감추어 드러내지 않았다. 임오(壬午 : 1522)년에 음직(蔭職 : 조상덕으로 하던 벼슬)인 소격서(昭格署) 참봉(參奉)을 하고 경기전 예빈시(慶基殿 禮賓寺)로 천직했다가 관례로 한성참군사온평시서직장(漢城參軍司 平市署直長)으로 옮겼다. 을미(乙未 : 1535)년에는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했고 얼마 있다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올랐다가 외직에 나가 아산 현감을 배수했다가 임기가 다하여 다시 전중(殿中)에 배하였다. 신축(辛丑 : 1541)년에 3년 동안 강릉(江陵) 통판(通判)으로 있다가 파직하고 돌아와 또 안동판관(安東判官)을 하고 무신(戊申 : 1548)년에는 충익부도사군자감판관(忠翊府都事軍資監判官)을 했다. 경술(庚戌 : 1550)년에는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다. 그해에 병이 극해서 드디어 졸(卒)하니 나이 61세였다. 6대조(六大祖) 황(璜)은 고려때에 문하평리(門下評理)를 했고 이가 덕생(德生)을 낳아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를 하고 고조(高祖) 감( )은 우군중랑장(右軍中郞漿)을, 증조(曾祖) 온( )은 고산현감(高山縣監)을 하였다. 조(祖) 광은(匡殷)은 무사로 현릉조(顯陵朝)에 벼슬해서 김종서(金宗瑞)와 서로 친한 관계로 그 화를 입어 9년동안 간성(杆城)으로 유배를 갔다가 이에 풀려서 유성(儒城)에 병거(屛居 : 세상을 물러난다는 뜻으로 은거함을 비유한 말)하여 드디어 유성인이 되었다. 고(考) 취(就)도 무관직(武官職)으로 벽단첨사(碧團僉事)를 했다. 종실(宗室) 평성군(枰城君) 위(偉)의 따님에 장가들어 공을 홍치(弘治) 경술(庚戌 : 1490)년에 낳았다. 부인은 공인(恭人) 최씨(崔氏)니 고(考)는 예조참판(禮曹參判) 명창(命昌)인데 학식과 행위로 기묘(己卯)의 제현(諸賢)중에 학자들이 송석(松石)선생이라 일컬었다. 공인(恭人)은 법문에서 자라 행동거지에 스스로 법규가 있고 공을 섬김에 덕에 어김이 없으며 선대(先代)의 제사를 받들고 유족인 고아들을 잘 기르니 다 예훈(禮訓)이 있었다. 홍치(弘治) 갑인(甲寅 : 1494)년에 나서 공보다 15년 뒤 갑자(甲子 : 1564)년에 졸하니 나이 71세였다. 2남 1녀가 있으나 장남 기(驥)는 공보다 일찍 죽고 차남 호(虎)는 생원(生員)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딸은 전 좌의정(左議政) 김귀영(金貴榮)에게 출가하고 기(驥)는 판관(判官) 최사립(崔斯立)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낳으니 허개(許漑)에게 출가했다. 참판(參判)의 선취(先娶)는 인의(引儀) 김지(金地)의 따님이며 후취는 옥천(沃川)의 명문인 육명신(陸明臣)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두니 남은 희손(喜孫)으로 영의정(領議政) 대성부원군(帶城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의정(議政)이 1남(男)을 두니 효전(孝全)이라 한다. 을사(乙巳)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익사훈질(翼社勳秩)로 책록되어 자헌(資憲) 벼슬을 하고 대원군(大院君)으로 봉해져 지금 공홍도(公洪道)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공은 무변에서 나서 능히 스스로 분연히 절하고 독서하여 일찍 스승과 벗을 얻어 의지하여 따랐다. 몸가짐과 행동거지가 평일에도 항상 예법을 지켜 스스로 일찍이 자경(自警)을 지어 허물을 경계하고 송사하는 마음 세 가지 잠언(箴言)을 걸어 좌우명으로 삼아 사람들이 전송(傳誦)하는 자 많았다. 어머니를 섬김에는 지극히 효도했고 늙어서도 하루같이 하였다. 제사를 받들고 상(喪)을 당함에 정(情)과 예(禮)를 다하여 일가와 종족을 다 어루만지고 사랑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자에게는 신주를 받들어서 제사를 지내주고 벼슬에 임해서는 반드시 아전을 잘 단속하고 백성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므로 항상 거(去)한 후에도 공을 사모하였다. 공이 늘 항상 공명(功名)은 서서 이룰 수 있다고 여겼는데 당화(黨禍)를 보고서는 이에 벼슬할 영화의 길을 끊어 부모를 잘 봉양하며 여러 동료들에게는 흔적을 멀리하고 드디어 위태로운 세상에서 몸은 온전히 얻으니 작은 벼슬에 허리를 꺽은 것은 그 본 뜻이 아니어서이다. 대부인(大夫人)이 늙어도 가마 타는 것을 싫어해 더욱 벼슬할 마음이 없었으니 쌍계동(雙溪洞)에 삼휴정사(三休靜舍)를 지어 노년을 마칠 계교를 세웠다가 얼마후에 대부인의 상을 당함에 공이 너무 지쳐서 졸(卒)하니 슬프도다! 공이 죽은 지 65년에 관찰공이 그 친구인 연성(延城) 이정구(李廷龜 : 1564~1635)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조에서는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있었는데 불행히 뜻을 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조(祖)와 고(考) 또한 불행히 세상을 일찍 떠나시니 불초손(不肖孫)이 거듭 더욱 없어질까 두려워 일찍이 주학사(朱學士 : 주지번)에게 대신 비에 필서(筆書)하게 하였으나 돌아보건대 다 그 행장(行狀)을 벌리지 못했도다. 불초손(不肖孫)이 다행히 조정에 자리를 얻어 은혜를 입으니 선조고(先祖考)는 좌승지(左承旨)에, 선고비(先祖 )는 숙부인(淑夫人)에 추증(追贈)되었도다. 지극한 나라의 은혜가 영광스러우니 원컨대 그대의 한 말을 얻어서 불후(不朽)함을 도모하겠소."라고 하니 나 또한 쌍계동(雙溪洞) 사람으로 공의 소문을 본디 들은지라 경건히 서(序)하여 명(銘)에 이르기를 쌍계(雙溪) 골짜기는 깊고도 넓어 구불거렸네. 석인(碩人)이 서지(棲遲 : 벼슬하지 않고 놀고 쉼)함이여 우울해서 펴지 못하는 자여 이는 석인(碩人)의 뜻이 아니겠는가. 쌍계(雙溪)의 물이여 맑게 흐르니 멈추면 못이 되고 흘러서는 내가 되네. 근원이 있는 것은 반드시 길고 후에 창성함이 마땅하리로다. <金大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