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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윤사석 묘비(尹師晳 墓碑)
시대
소재지 대전광역시 유성구 반석동
출처 대전금석문
작성일 2005-01-26 00:00:00.0
조회 5742
첨부
상세정보 찬 자 : 趙秉輯 서 자 : 李元鎬 규 모 : 전체높이 195cm, 비신 높이 133cm, 비신 폭 44cm, 비신 두께 27.5cm 연산군(燕山君) 때에 곧은 말을 꺼리지 않다가 기미를 보고 물러와서 알아주는 이 없어도 뉘우치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바로 만돈암(晩遯庵) 윤선생(尹先生)이다. 선생의 휘는 사석(師晳)이고 파평(坡平)에서 선계가 나왔으니 파평의 윤씨가 고려태사 개국공신(高麗太師 開國功臣) 신달(莘達)에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유명한 신하가 되었고 그 후에 관(瓘)은 문과 장원으로 예종(睿宗)을 도와 공을 세움으로 영평현 개국백(鈴平縣 開國伯)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조선에 이르러 곤(坤)은 추 충익대좌명공신(推 忠翊戴佐命功臣)으로 숭정대부 이조판서(崇政大夫 吏曹判書)이며 시호가 소정(昭靖)이니 이가 증조가 되고 조부 희제(希齊)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증좌찬성(贈左贊成)이고 아버지 은(垠)은 음직으로 참의(參議)이니 성품이 청렴 공평하였고 장차 충경공(忠景公) 사로(師路)의 귀함으로 증우의정 영평부원군(贈右議政 鈴平府院君)이 되었다. 어머니는 용구군 부인(龍駒郡夫人) 용인이씨(龍仁李氏)니 판관(判官) 수상(守常)의 따님이다.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았으며 옛것을 믿고 의리를 좋아하며 명예와 절개를 힘쓰고 가다듬었다. 파주에 집을 짓고 경의(敬義)로 현판을 달았으며 좌우(左右)에 책으로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 경전을 널리 구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버리고 침잠에 수양하여 조예가 더욱 높아갔다. 성종 조(成宗 朝)에 주부(主簿)와 현감에 천거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봉사(封事)를 올렸으니 그 대략에 이르되 "나라 일은 날마다 글러지고 인심은 날마다 이탈하니 비록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재주를 겸했더라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정유(丁酉)에는 집의(執義)로 불렀으니 서민들의 곤궁한 상황을 지극히 말하고 연산군이 실덕함에 미쳐서는 봉사(封事)를 올려 극언했으나 임금이 들을 생각이 없으므로 이에 상소를 소매에 넣고 들어가서 화패가 있을 것을 역설하다가 모자를 벗어 찢어 버리고 드디어 청주(淸州)의 옥화대(玉華臺)로 내려와 그 집의 이름을 만돈(晩遯)이라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만경(萬景)이라 하였으며 소나무와 버들 각각 다섯 그루를 심고 스스로 도연명(陶淵明)의 후인이라 하였다. 후진들을 가르치니 학도가 모여들었다. 그의 학문이 주정(主靜)으로 기초를 삼고 고결(高潔)을 숭상했으며 공명(功名)은 공중의 한쪽 구름처럼 여기었다. 늘 냇물 위에 거닐면서 만물이 빈속에 잠긴 것을 보고 이르기를 "군자가 이치에 밝으면 이와 같이 한점의 티끌도 없어진다"하였다. 또 이르되 "학자는 공부를 익숙히 함에 요체가 있다"하였다. 문인들이 묻기를 선생의 높은 절개가 엄자릉(嚴子陵)과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되 오(惡 : 깜짝놀램)과 어찌 바라리오? 나는 이 세상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니라 하였다. 일찍이 자손들에게 경계해서 과거에 응하지 말라 하였다. 돌아가자 공주 유성 가장동(加藏洞) 건좌(乾坐)에 장사 지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충주박씨(忠州朴氏)니 사정 충함(司正 忠 )의 따님이다. 묘는 좌측으로 합장하였다. 3남 3녀를 두었으니 욱( )은 음직으로 수의(修義)이고 전( )은 현감(縣監)이고 적( )은 사과(司果)이며 따님은 윤취은(尹就殷)과 조각(趙珏)과 김석규(金碩珪)이다. 욱의 아들 은좌(殷佐)는 찰방(察訪)이고 은필(殷弼)이며 전의 아들은 세형(世衡)은 첨추(僉樞)이고 세신(世莘)은 별좌(別坐)이며 적의 아들은 세필(世弼)이다. 증손 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선생의 가문으로 마땅히 높은 벼슬에 오르고 무거운 권력을 잡아야 할텐데 이러함을 하지 않고 높이 멀리 떠나서 숲 속에서 늘그막을 마치어 초연하게 일망타진(一網打盡)의 사회에서 벗어났으니 진실로 기미를 아는 군자가 아니면 누가 능히 하리오? 선생의 시에 이른바 공명의 줄을 헌신짝과 같게 여긴다는 것이 과연 빈 말이 아니었도다. 진실로 호남 영남에서 사당을 세울만한데 감추기를 너무해서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실이 세상에 모두 전하지 못했으니 아깝도다. 선생의 후손에 섭동(攝東) 충혁(忠爀) 상현(象鉉)이 그 사적을 기술해서 묘문을 청하였기에 나의 고루함으로 어찌 잠긴 사실을 천명할 수 있으리오마는 사양하다 못해 그 행략을 가려 뽑아 서술해서 보내면서 명을 하니 가로되, 교동(喬桐)이 임금다웁지 못하자 사람들 입다물고 말이 없었네. 이때 선생께선 봉황새 울음 같았지. 비늘을 거스려도 고치지 않자 시원히 날아 멀리 떠났도다. 옥화대의 그친 물은 허공을 담구어 이치를 밝히었네. 높직한 무덤 있으니 공산의 동쪽이로다. 나는 그 비석에 명문을 새겨 무궁토록 보이리라. 가장동으로부터 자좌(子坐)에 옮기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 규장각원임직각(奎章閣原任直閣) 풍양 조병집( 壤 趙秉輯)은 짓다. 후학 진성 이원호(眞城 李元鎬)는 쓰다. 정사(丁巳) 8월 6일 을사(乙巳) 10월 일 세우다. <李性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