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대전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합니다

자료마당Data's room

주요소장유물
명칭 이종길 묘표(李宗吉 墓表)
시대
소재지 대전광역시 대덕구 삼정동
출처 대전금석문
작성일 2005-02-01
조회 4371
첨부
상세정보 찬 자 : 黃 ■ 서 자 : 朴後奭 규 모 : 전체높이 134cm, 비신 높이 122cm, 비신 폭 56cm, 비신 두께 14cm 덕봉 이공묘표(德峯 李公墓表)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사간원(行司諫院) 대사간(大司諫) 황호(黃■)는 짓다. 덕봉 이공(德峯 李公)이 죽은지 30여년만에 창원 황호(昌原 黃■)가 묘표를 지어 이르기를 이에 표(表)를 할만 하도다. 대저 표(表)라 함은 이름을 드날려서 후세를 권면하는 것이니 죽은 이에 표하여 산이를 권면하고 앞에 일을 표해서 뒤를 권면하며 시골에 표해서 시골을 권면하고 시골을 권면해서 나라도 풍동할 수 있는 것이니 공은 그 표를 갖추었으니 어찌 표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이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으며 조금 성장하자 어버이에게 효도할 줄 알아서 공경으로 봉양함이 부족한 데가 없었다. 부모가 일컫기를 훌륭한 아들이라 하였다. 임진(壬辰 : 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서 공의 아버지께서 의주(義州)로 임금을 따라가서 공은 어머니를 받들고 ……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었다. 공은 나가서는 밭을 갈고 들어오면 장사하여 위로 섬기고 아래로는 길러서 일백 명의 가족이 굶주린 빛이 없었으며 이웃에까지 미치었다. 정유(丁酉 : 1597)년에 왜적이 재차 쳐들어오자 호서(湖西)로 올라와 죽이고 노략질하니 공이 아버지와 함께 숲 속에 숨었다가 아버지가 왜적을 만나 …… 공이 부르짖어 울며 생명을 바꾸려 하니 …… 도적이 의롭게 여겨 놓아주었으나 이미 칼날에 상한지라 10일만에 돌아갔다. 공이 이미 장사지내고 상복을 벗은 다음 드디어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과거공부도 폐지하고 이르되 내가 부모와 함께 왜병에게 죽지 못하고 무슨 마음으로 세상에 서리오 하고 매양 소학을 읽다가 왕부(王 )의 일에 이르면 문득 책을 폐지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여 종신토록 마지않았다. 돌아간 부모를 섬김에도 생존과 같이 해서 재계하고 정성들여 오래도록 더욱 돈독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효도함이었다. 공이 두 아우가 있었는데 차마 떨어져 살지 못하여 함께 살며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허물이 있으면 자기에게 돌리고 산업을 나누며 시비(侍婢)까지 나누어주되 아끼지 않았다. 또한 양당형님이 있었는데 공은 일찍이 아버지처럼 섬기었으니 이는 그의 우애와 공손이었다. 공이 집안들과 화목하고 시골 마을에게도 후하게 하며 또한 남의 급한 일에 추창하기를 자기 일과 같이 했으며 친구와 더불어 미덥게 하고 교제를 취한 바가 모두 한 때의 소문난 사람들이었으니 훌륭한 덕망이라 이르지 못하겠는가? 공이 여러 아들을 가르치기를 옳은 방도로 했으며 혹은 이야기가 세상의 정치와 사람의 장단에 미치면 반드시 엄격히 꾸짖고 오직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경사(經史)만을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게 하였다. 해서 마침내 성립한 바가 있게 하였으니 어진 부형이라 하지 않겠는가? 아! 공의 덕행이 거의 인륜을 다했으니 표를 세우면 권면함이 있지 못하겠는가? 그 자손들이 그 선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 시골의 사람들이 사모해서 본받는 이가 있지 않겠는가? 이로부터 나라에까지 풍동하면 기필코 이 표에서처럼 아니되지는 않겠는가? 생각건대 이씨(李氏)는 경주인(慶州人)이니 시조 알평(謁平)이 신라시조와 같은 때였으며 신라로부터 고려에 내려오면서 벼슬이 이어 빛났고 우리 광묘(光廟)조에 이르러 계림군(鷄林君) 흥상(興商)이 공에게 6대조가 된다. 증조는 대(玳)이고 조부는 성호(成瑚)이고 아버지는 굉(宏)이니 홍주이씨(洪州李氏) 광호(光豪)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융경 정묘(隆慶 丁卯 : 1567) 12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종길(宗吉)이고 자는 군적(君迪)이며 덕봉(德峯)은 그의 아호이다. 만력 정사(萬曆 丁巳 : 1617) 5월 9일에 죽으니 나이 겨우 51세이다. 회덕 형강(荊江)의 남쪽 삼정동(三政洞) 해좌 사향(亥坐巳向) 한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먼저 수안이씨(遂安李氏) 몽열(夢說)의 따님에 장가들어 부덕이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고 1남을 두었으니 국배(國培)인데 또 일찍 죽고 계배는 은진송씨(恩津宋氏)니 숙(琡)의 따님인데 2남 1녀를 두었으니 덕배(德培)는 현령이고 다음은 극배(克培)이니 재주있어 과거 재목으로 일컬어졌다. 따님은 오익준(吳益俊)에게 출가했다. 덕배가 4남 4녀를 두었으니 정익(廷翊)과 경익(慶翊) 창익(昌翊) 양익(陽翊)이고 4녀는 숙(■) 이공(李公) 나머지는 어리다. 극배는 1남 1녀를 두었으니 사익( 翊)이고 녀는 정필(鄭 )이다. 오익준(吳益俊)이 1남 2녀를 두었으니 현국(顯國)과 정지호(鄭之浩)요, 다음은 성취하지 못했다. 정익(廷翊)이 2남을 두었으니 선의(善意)와 현의(顯意)이다. 송유인(宋孺人)은 옛날 법도 있는 자녀이라 글을 알고 예법을 익혔으며 더욱 소학(小學)을 익혀서 공에게 시집온 후 시어른을 공경하고 동서들과 돈돈하며 전실 아들 어루만지기를 매우 지극히 하니 사람들이 전실 소생인줄을 모르게 되었다. 전유인의 친정 동생이 의탁할 곳이 없으므로 공에게 권해서 데려다가 시집보냈고 직접 현령하는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 아버지의 엄격함과 같았다. 시종 무태(無怠)하였다. 갑술(甲戌 : 1574)년 9월 22일에 출생해서 무신(戊申 : 1668) 7월 6일에 돌아갔고 공과 함께 같은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유인같은 분인 옛날에 일컫는 여사(女士)로서 표할만 한 자로다. 현령군(縣令君)이 비록 낮은 자리에서 잠겨 있으나 명성이 훌륭하니 장차 나타내어 묘소에 빛냄을 기다리면서 다만 그 큰 사실만을 표시하노라. 연창후인(延昌後人) 박후석(朴後奭)은 쓰노라. <李性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