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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괴곡동(槐谷洞)
    괴곡동(槐谷洞) 게시글에 대한 등록 이미지
출처 《大田地名誌》(大田直轄市史編纂委員會, 1994)
작성일 2005-04-19
조회 9434
첨부 1113877070.55_괴곡동.jpg (9.7KB)
상세정보 〔위치〕동쪽은 안영동, 서쪽은 관저동, 남쪽은 흑석동, 북쪽은 가수원동에 접경한 마을이다.
〔유래〕마을지형이 고리와 흡사함으로 고릿골이라 불렀고, 오래 묵은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이기에 괴곡리라 부르게 되었다.
〔연혁〕괴곡동은 백제(百濟)때 진현현(眞峴縣)에 속했으며 신라(新羅)때는 진령현(鎭嶺縣)에 속했었다. 고려(高麗)때는 기성부(杞城府)에 속했으며 뒤에 공주부의 영역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진잠현(鎭岑縣)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말기 고종(高宗) 32년(1895)에는 진잠군(鎭岑郡)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선곡리(仙谷里)와 병합하여 괴곡리라 부르고, 대전군 기성면에 속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함에 따라 대덕군에 속하였고,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서구 가수원동으로 속하게 되었다.
<지명>
가마바위〔바위〕
〔위치〕장수바위 맞은편에 있는 바위이다.
〔유래〕가마 속에 갑옷이 들어 있다고 하여 그리 부른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강변(江邊),(중촌(中村))〔마을〕
〔위치〕고리 골과 새뜸 사이로 강변에 있는 2호의 마을이다.
〔유래〕고리골과 새뜸의 중간 마을이라서 중촌이라 부르고, 갑천 강변에 위치했다 해서 강변 마을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고리골(괴곡(槐谷))〔마을〕
〔위치〕괴곡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현재 괴곡1동으로 농촌형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유래〕마을의 지형이 고리(槐谷, 柳器)와 같이 둥그렇게 둘러싼 것 같다하여 생긴 이름으로 약 80호가 살고 있다.
고리골버드나무〔나무〕
〔위치〕괴곡 789번지에 있는데 마을나무(6-3-10-10)로 1982년 11월 1일에 지정되었다.
〔특이사항〕수고는 24m이고, 나무 둘레는 6.2m이다. 수령은 128년이며 괴곡동 789번지의 윤원병씨가 관리하고 있다.
괴곡 건널목〔건널목〕
〔위치〕대전 기점 13.65㎞에 있는 호남선 철도 건널목이다.
〔특이사항〕1988년 9월 25일에 설치하여 관리하고 있다.
괴곡교(槐谷橋)〔다리〕
〔위치〕가수원동에서 기성동으로 통하는 다리이다.
〔유래〕1983년 5월 30일에 착공하여 1984년 12월 31일에 완공되었다. 총연장은 170m, 교폭은 7.5m이다.
괴곡동느티나무〔나무〕
〔위치〕괴곡동 524번지에 있는 1982년에 지정된 시나무(6-3-9-1)이다.
〔특이사항〕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제를 지내어 한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나무로 통하며, 괴곡동 524번지의 박종구씨가 보호하고 있다.
괴곡 수영장(塊谷 水泳場)〔수영장〕
〔위치〕상보안에 있는 깨끗한 천수욕장을 지칭한다.
괴곡터널〔터널〕
〔위치〕대전 기점 14.1∼14.36㎞ 사이에 있는 260m의 호남선 터널이다.
대전직할시공설묘지(大田直轄市公設墓地)〔묘지〕
〔위치〕서구 괴곡동 산 55번지에 있는 공설묘지이다.
〔특이사항〕총면적은 499.440㎡(150.180평)이고, 이장 가능 면적은 125.400㎡(38,000평)이다.
모새골(사동(沙洞))〔마을〕
〔위치〕고리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주변에 모래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벌말〔마을〕
〔위치〕고리골에서 남쪽으로 약 20호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이다.
범등골〔골〕
〔위치〕괴곡동 구억뜸 서쪽에 있는 작고 좁은 골짜기 아래에 있다.
〔유래〕전에 구봉산을 타고 범이 이 골짜기까지 내려왔다 하여 그리 부른다.
〔풀이〕''''범든골''''이라 부른 것이 범등골이 된 것은 자음동화의 결과이다.
북뜸〔마을〕
〔위치〕고리골 북쪽에 있는 동네 이름으로, 적뜸이라고도 부르며 6호가 살고 있다.
사냥골(사양곡(斜陽谷))〔마을〕
〔유래〕저녁 때까지 볕이 따뜻하게 드는 마을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현재 2가구가 살고 있다.
사냥골〔골〕
〔위치〕선골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유래〕옛날에 사냥하던 계곡이라고 한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상보안(상보내(上洑內))〔마을〕
〔위치〕고리골 아래 상보(上洑)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상보(上洑)의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상보안, 또는 상보리(上洑里)라고 하는 바, 현재 20여 호가 살고 있다.
새보〔보〕
〔위치〕괴곡동과 흑석동의 경계에 있는 보이다.
〔유래〕새로막은 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리었다
새뜸¹(신촌(新村))〔마을〕
〔위치〕고리골 남쪽에 새로 마을이 생겼다 해서 새뜸이라 부르는데, 현재는 겨우 3가구가 살고 있다.
새뜸²〔마을〕
〔유래〕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생긴 이름으로 현재 1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샛고개〔고개〕
〔위치〕선바위가 있는 고개이다.
〔유래〕뱃줄을 매는 고개라 하여 샛고개라고 부른다. 큰샛고개, 작은샛고개라고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서거산(徐去山)〔산〕
〔위치〕장수바위가 있는 서편의 산이다.
〔유래〕배가 천천히 간다는 뜻으로 서거산이라 부른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선골(선곡(仙谷))〔마을〕
〔위치〕고리골에서 동쪽으로 갑천 건너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유래〕옛 이름은 마을 지형이 배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선골(船谷)이라 하였는데, 근래엔 선인들이 내려와서 놀고 갈만큼 아름다운 계곡이라 하여 선곡(仙谷)으로 불리고 있다. 윗선골과 아랫선골을 합쳐서 괴곡2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특이사항〕해주 오씨 집성촌으로 현재도 20여 호가 거주하고 있다. 전형적인 농촌으로 가가호호 지하수를 식수로 하며, 오지로 교통이 매우 불편하다.
선골고재(선곡현(仙谷峴))〔고개〕
〔위치〕선골 앞에서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이다.
〔풀이〕한자어+고유어+고유어로 된 복합어 지명이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선바위(장사암(將師岩), 장수바위)〔바위〕
〔위치〕선골 앞산 너머에 있는 바위이다.
〔유래〕옛부터 이곳에 행주향 명당(行舟向 名堂)이 있는데, 배를 매는 바위라고 전하여 내려온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소통골〔골〕
〔위치〕선골 아랫뜸에 있는 골짜기이다.
〔특이사항〕현재 2가구가 거주하고 있고, 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신선바위(신선암(神仙岩))〔바위〕
〔위치〕가마바위 남쪽 위편에 있는 바위이다.
〔유래〕신선이 놀던 바위라하여 신선바위라고 부른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안영고개(안영현(安永峴))〔고개〕
〔위치〕선골에서 안영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의 이름이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언목고개〔고개〕
〔위치〕선골에서 흑석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의 이름이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왕버들〔나무〕
〔위치〕괴곡동 377-7에 자리 잡은 두 가지로 자란 왕버드나무가 1990년 9월 13일에 보호목으로 지정되었다.
〔특이사항〕수령은 150년, 수고는 30m, 나무둘레는 3m이며, 현재 괴곡동 377-7번지의 박원순씨가 보살펴 주고 있다.
장수바위〔바위〕
〔위치〕윗선골 뒷산 높은 곳에 있는 바위이다.
〔유래〕세 개의 바위가 받침대처럼 놓여 있고 그 위에 큰 바위가 묘하게 올려져 있어 이를 장수바위라고 한다. 옛날 장수가 이 큰돌을 올려놨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텅텅바위(흔들바위)〔바위〕
〔위치〕윗선골 뒷산 중턱에 있는 바위이다.
〔유래〕집채만큼 큰 바위임에도 돌로 치면 텅텅소리가 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흔들면 움직인다 하여 흔들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철이산(동산(東出))〔산〕
〔위치〕윗선골의 동산(東山)을 말한다.
〔유래〕해 뜨는 산이라 하여 해철이 산으로 부른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화재바위(말똥바위, 화재암(火災岩))〔바위〕
〔위치〕작은 샛고개 옆에 솟아 있는 바위이다.
〔유래〕이 화재 바위에서 돌이 떨어져서 불빛이 반짝하면 내 건너 고리골에서 화재가 났다는 전설이 있다. 그 후로 화재 방지를 위하여 말똥바위로 이름을 바꿨다.
〔특이사항〕현재 정림동 관할 지역이다.
<토속>

괴곡동의 선창(船艙)
괴곡동 2구 사냥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선골 뒤 높은 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작은 산부리가 선골 전체 입구를 가로막듯 살짝 감싸고 있고, 역시 선골에서 흐르는 도랑이 산발치를 지나 갑천과 닿고 있다. 이 산부리 부근을 ''''선창''''이라 부르는데, 배와는 관계없는 이곳이 이런 이름으로 불리 게 된 것은 선골 전체가 풍수지리상 배형국을 이루고 있으며, 이 지점이 뱃머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뱃머리가 물가에 매어있다는 뜻에서라고 한다. 한편, 풍수지리상의 이런 특징 때문에 옛날부터 선골에는 우물을 많이 파지 않고 살아왔었는데 근래 이런 속신이 약화되면서 거의 집집마다 지하수를 뽑아 쓰게 되었고, 그런 뒤부터 사람이 많이 죽는 등 마을에 재앙이 빈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인물>

김여온 묘소(金汝溫 墓所)(묘)
김여온의 묘가 선골에 있다. 김여온(1550<명종 5>∼1592<선조 25>)은 공주 계룡면 노포리에서 출생하여, 의영고 주부와 한림원 한림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조헌(趙憲), 양응춘(楊應春) 등과 의병 선봉장으로 왜군을 물리치고, 금산으로 진격하였다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자손들이 시신을 찾아 선골 현 위치에 장례하였다고 한다.
열부박씨비각(烈婦朴氏碑閣)〔정문〕
열녀 오원근처 충주 박씨의 비각이 을축(乙丑, 1865) 3월에 건립되어 선골 어귀에 있다.
우병사 묘소(禹兵使墓所)
선골(仙谷) 마을에 조선 시대 인조 때의 공신인 우병사의 묘소가 있다.
병사는 종2품의 무관으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준말이다. 1624(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파천(播遷)하게 되었는데, 금강(錦江)이 얼음이 얼어서 왕이 망설이고 있으므로 우병사가 얼음을 깨면서까지 도강(渡江)을 시켰다고 한다. 이 공로로 뒤에 우병사는 청주병사(淸州兵使)까지 역임하였다고 한다.
우병사(禹兵便)지팡이 돌
선골(仙谷) 마을 뒤쪽에 서있는 두 길 남짓한 돌로써, 인조 2년(1624) 이괄(李造)의 난 때 임금의 공주 파천에 공을 세운 우병사가 지팡이처럼 짚고 다니던 돌이라 한다. 처음에는 대전시 판암동에 있었고 그곳 주민들이 이 돌앞에 제사를 드렸었는데, 그 마을이 점차 쇠퇴하여 주민들이 이 돌로 돌다리를 놓았던 것을 뒤에 우병사 자손들이 이곳 우병사 묘소 앞에 옮겨 놓았다고 한다.
윤흡의 신도비(尹翕神道碑)
고리골 동네 앞에 있다. 윤흡(1580<선조 13>∼1633<인조 11>)은 윤창세의 넷째 아들로, 음보로 이인도찰방(利仁道察訪)이 되었었는데, 그의 치적이 뛰어나 군자감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장예원 사평(司評)을 지냈다. 그 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1949년 5월 동래 후인 정인보가 지은 공의 신도비가, 1990년에 10대 손인 윤해병 씨에 의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