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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학자, 두문동(柱門洞) 현인(賢人), 본관은 회덕(懷德), 회덕황씨 시조 윤보(允寶)의 손(孫), 연기(衍記)의 아들로 회덕 관동(寬洞) 지금의 대전(大田) 동구(東區) 마산동(관동)에서 출생(出生)하였다.
어려서 가학(家學)으로 유학(儒學)에 밝아 목은(牧隱) 이색(李穡), 밀산(密山) 변계량(卞季良) 진산호정(晉山浩亭) 하윤(何崙)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로 왕래(往來)하며 학문(學問)을 닦아 사림(士林)들의 높은 신망(信望)을 받았다. 일찍이 수안군사(遂安郡事)를 하였다가 만년에 그 선친(先親)인 연기(衍記)가 중건(重建)한 미륵원(彌勳院)에서 영호남(嶺湖南)을 오르내리는 행려자(行旅者)등을 후대(厚待)하였다. 미륵원(彌勒院)은 본시 1332년(고려 충혜왕2년)부터 1352년(고려 충정왕3년)까지 매년 겨울에 원(院)을 열어 여행자를 도왔으며 연기(衍記)가 죽은 뒤에도 공(公)의 형제(兄弟)는 선친(先親)의 뜻을 받들어 사재(私財)를 들여 낡은 원(院)을 새로 중건(重建)하여 행려자(行旅者)들이 여름에도 더위를 피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두 형제는 미륵원의 남쪽 부근에 따로 새 건물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루(南樓)라 하였다.
이와 같은 황수(黃粹) 부자(父子)의 선행(善行)을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미륵원남루기(彌勒院南樓記)에서
전(前) 지수안군사(知遂安郡事) 황수(黃粹)가 편지로써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李穡)에게 요청(要請)하기를 "수(粹)의 부(父)가 일찍이 우리 고을에 미륵원(彌勒院)을 지었으니 즉 1332년 임신(壬申)년부터 중건(重建)하여 경영한 것이 1351년 신묘(辛卯)년까지 매양 겨울에 행려자(行旅者)에 베풀다가 명년(明年) 추칠월(秋七月)에 병이 나서 여러 아들을 보고 이르기를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받아 미륵원(彌勒院)을 수리(修理)하여 혹시라도 내 뜻하는 바를 떨어버리지 말아야한다" 하고 고요히 운명하였다. 그래서 나의 형(兄)님 셋이 있는데 아버지 뜻을 받들며 주선하는지가 지금 30년이나 되었다. 무리를 모집도 아니하고 공장(工匠)도 구하지 않고서 집을 짓는데 옛것을 다 헐고 새로이 하니 그 규모는 다른 원(院)에 비하면 아름다웁게 꾸며졌다 <다른 원(院)이란 이 근방에 광도원(廣道院)(유성 부근) 불현원(佛峴院)(도마동 부근) 창덕원(昌德院)(회덕 서면부근) 형술원(荊述院)(회덕 북면부근) 총지원(寵止院)(회덕 일도면 부근) 여아원(餘兒院)(회덕 남면부근)을 말한다. 이러한 원(院)은 지금에는 없어졌다> 여름에 야채나물을 대접하고 겨울에 탕을 대접하기는 옛날에 비해 더 낮을 것이 없어 선친(先親)의 뜻에 위배되지 않다며 또 생각에는 여름에 당하여 손님들이 이 원(院)을 지남에 쉬는 장소가 시원한 곳이 없어서 이점이 다 잘못된 점이라며 이에서 남루(南樓)를 건립하여 루(樓)가 완성되었다 하고 또 생각컨대 찬 샘물이 없어 그 마음을 청정(淸正)할 곳이 없으매 마음에 큰 걱정을 하였는데 꿈에 이인(異人)이 나타나서 샘물이 나오는 곳을 가르쳐 주어서 과연 샘물이 솟아 나왔다 하니 과연 천지감응(天地感應)의 힘을 얻어서 이다. 이것으로 족히 징법될 것이라 하여 남루기(南樓記)를 지은 것이지만 이색(李穡)은 말하건대 베푸름을 좋아하는 자는 인인(仁人)이오. 장자(長子)의 처사(處事)이다. 집이 있어 풍우(風雨)를 피하고 루(樓)가 있어 더위도 피하며 탕(湯)도 있고 찬샘도 있으며 채소도 입에 알맞고 하여 행려자(行旅者)들이 황씨(黃氏)에 은혜 받은 바가 많았다. 황씨부자(黃氏父子)는 부자간에는 자효(慈孝)하고 형제(兄弟)간에는 우공(友恭)하여 널리 사람들에 은혜를 베푸른 일이 이와 같으니 사관(吏官)들은 마땅히 기록해야 옳다고 보아 이색(李穡)이 사관(史官)의 일을 계승하여 이에 기록한다.
라고 하였다. 이 기록이 홍무(洪武)14년 즉 서기 1381년 2월에 일이니 고려 우왕(禑王) 7년 신유(辛酉)년이다.
여기에 제영(題詠)을 한 학자 이름이 19인(人)이나 되는데 모두 거유(巨儒)들이다. 열거하면
韓山 李益○, 晉山浩亭 河崙, 文山 柳穎, 檜谷 趙墳, 晉陽郊隱 鄭以吾, 西原 韓尙德, 星山 李稷, 晉州 鄭 , 竹溪 安純, 丹陽 張子崇, 密山 卞季良, 獨谷 成石璘, 平壤雨亭 趙樸, 晉陽後學 河濱, 迷老友平陽 朴可恒, 河東 鄭隣趾, 後孫 生員黃待輿, 尤庵 宋時烈, 後孫守愚齋 黃寔
등이다. 지금도 그들의 제영(題詠)들이 편액(扁額)으로 걸려 있다.
이와 같이 중앙집권 거유(巨儒) 선정(先正)들의 글이 걸려 찬한 것으로 보아도 공(公)의 수준이 얼마나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公)의 자(子) 자후(自厚)(1363∼1440)는 세종조(世宗朝) 문신(文臣)으로 태평성세(泰平盛世)를 이룩하는데 역할이 컸고 또한 부친(父親)인 공(公)의 뜻을 이어서 미륵원(彌勒院)과 남루(南樓)에서 행려자(行旅者)를 위해 도와준 일은 그 후대(後代)에 까지 정훈(庭訓)으로 전(傳)해왔으며 더구나 자후(自厚)의 아들 유(裕)는 태종(太宗)의 부마로서 당시 지위가 높았다. 또 공(公)의 서(壻)는 은진인(恩津人) 송명의(宋明誼)이다. 오늘에 와서도 공(公)의 사실(事實)은 남루기(南樓記)에 담아 전(傳)하고 있는 것이다.
《자료 : 南樓記 同題詠, 大田市史》
《權寧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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