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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명 황유(黃裕)
생몰년대 조선초기
출생지
출처
조회 7002 작성일 2008-03-19 00:00:00.0
첨부
상세정보 조선초기 문신. 황유(黃裕)의 본관은 회덕이다. 회덕 황씨(懷德黃氏)는 고려말 조선 초에 이 지역에서 유수한 세력으로 행세한 씨족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성씨조(姓氏條)에 의하면 당시 회덕지방의 성씨는 4개의 토성(土姓)이 있었는데, 황(黃), 임(任), 방(房)의 사성(四姓)이 그것이다. 회덕 황씨의 중시조(中始祖)는 황윤보(黃允寶)이다. 그는 고려말 형부전서(刑部典書)를 역임한 인물인데, 이 때부터 이들 회덕 황씨가 지금의 대전지역에서 유력한 씨족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황유는 곧 중시조 황윤보의 현손(玄孫)이며, 고려때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낸 자후(自厚)의 아들이다. 황자후는 조선 태종 때에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412년(태종13년)에는 형조좌참의(刑曹坐參議)에 올랐고(이 때 그는 호패법의 시행을 건의하여 이를 관철하였다), 다시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쳤으며, 세종조에는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 都觀察使), 한성부윤(漢城府尹), 중추원사(中樞院使)등의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황유는 이러한 빛나는 가문의 후광을 받아 왕실과 혼인하였으니, 곧 태종의 11년 숙안옹주(淑安翁主)의 부군으로 태종의 부마(附馬)가 된 것이다. 황유는 이로써 처음에 회천위(懷川尉 : 회천은 회덕의 옛 이름이다)에 봉해졌으며, 만년에는 봉군(封君)되었다. 황유는 숙안옹주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그는 죽은 후에 광주(廣州) 퇴촌(退村)의 어머니(郡夫入 韓氏)묘 아래에 장사되었고, 숙안옹주는 양주(楊州)에 장사되었는데, 황유의 묘는 실전(失傳)되었다가 후일 후손 생원(生員) 황규현(黃圭顯)에 의해 찾아졌고, 훗날 옹주묘가 개발로 인해 황유의 묘 아래로 이장되었다. 황유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도수리에 위치하고 있다. 《자료 : 世宗實錄地理志 권149, 東國與地勝覽, 懷德邑誌, 懷德黃氏大問譜, 文獻備考권50 帝系考, 燃藜室記述, 太宗朝故事本末, 續大德郡誌》 《韓基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