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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소장유물
유적명 창계숭절사(滄溪崇節祠)
위치 대전광역시 중구 안영동 560
시대 1923년
소유자 박헌석(朴憲錫)
지정종별번호 대전광역시문화재자료 제2호
출처
작성일 2005-03-06
조회 10253
첨부
상세정보 숭절사는 앞에 유등천(柳等川)이 흐르고 뒤에 멀찌감치 병풍처럼 겹쳐져 있는 산줄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천명(川名)은 또한 창계(滄溪)라 불리워서 이 사명(祠名) 역시 창계숭절사라고도 한다.
향사인(享祀人)은 사육신(死六臣)의 일인인 취금헌 박팽년(翠琴軒 朴彭年)과 그의 동지였던 박심문(朴審問, 1408∼1456) 두 분이다. 박심문의 자는 신숙(愼叔)이요, 호는 청재(淸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그의 부(父)는 세종 때 집현전 학사와 부제학을 지낸 박강생(朴剛生)이며 조(祖)는 조선 개국 때 이군불사(二君不事)의 두문동(杜門洞) 72현 가운데 한 분인 박침(朴 )이다.
박심문은 23세 때인 세종 13년(1431) 문과에 급제하여 사로(仕路)에 올라 육진(六鎭) 개척 때는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를 따라 큰 공을 세웠으며 예조정랑(禮曹正郞)로 있다가 세조가 즉위하자 사육신과 뜻을 같이 하여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러다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중 의주(義州)에 이르러 육신(六臣)의 처형 소식을 듣고 아연실색하여 "내가 육신으로 더불어 죽기를 맹약하였는데 내 어찌 차마 혼자만 살 수 있으리오"하며 음독 순절하였으니 바로 사육신과 더불어 의(義)를 하나 같이 하였다.
그후 그의 이러한 행적은 세상에 묻혀졌다가 순조 때 비로소 조정에 알려져 동왕 4년(1804) 그에게 왕이 직접 "정충고절불하육신(貞忠苦善節不下六臣[貞忠과 苦節은 六臣에 못지 않다])" 여덟 글자를 써서 내리었고 아울러 이조참판(吏曹參判)[그 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였다. 시호는 고종 8년(1871) 충정(忠貞)으로 정해졌다. 이에 사육신에 그를 함께 해 사칠신(四七臣)이라고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칠신입사(七臣立祠)가 관향(貫鄕)과 구거지(舊居址), 묘하(墓下)에 있었는데 유독 그가 처음 터 잡은 이래 그의 후손들이 몰려사는 이곳 안영동만이 빠졌으므로 후예인 사인(士人) 박연황(朴淵璜)이 널리 사림의 공의(公議)를 모아 1923년에 숭절사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숭절사 사당 밑에는 강당인 상의당(尙義堂,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16평)도 같이 마련하였다. 그후 두 건물이 퇴락되어 1977∼1978년 양년에 걸쳐 중수하였다.
〈숭절사기(崇節祠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