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다.
6·25 전쟁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4,000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정부는 이들 중 여순사건과 제주 4·3 관련 수감자 등 2,000여 명을 정치·사상범 즉, 좌익으로 분류했다. 6월 28일부터 사흘간 이들 수감자 중 여순사건 재소자와 예비검
속으로 체포돼 일시 수감됐던 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 등 1,4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산내 골령골로 끌려가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7월 3일부터 사흘간은 제주4·3 항쟁 재소자를 포함해 1,800∼2,000명이 학살됐다.
3차에 걸쳐 7,000여 명 학살
학살의 명분은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 재소자들이 북한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 공산당 우두머리와 좌익 극렬분자를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무관 에드워드 중령의 1950
년 9월 23일자 A-1등급 보고서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에서 확인된다. 7월 6일부터 17일까지 벌어진 3차 학살의 희생자는 영등포와 서대문, 수원 형무소에서 가석방돼 열차를 타고 내려오다가 대전역에서 마구잡이로 연행된 사
람들과 공주·청주 형무소 재소 일반사범, 서산경찰서 보도연맹원 등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3,700여 명이다. 학살은 육군형무소 육군이 주도했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의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라는 팸플릿 기사로 확인된다.
그동안 우리 군 헌병대와 경찰, 우익단체에 의해 자행된 산내 골령골학살은 추모는 고사하고 진상조사조차, 사실 인정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난 2007년에서야 비로소 진실화해위원회 주도로 유해발굴이 시작됐으나 34구를 발굴하는 데 그쳤다. 2015년민간 차원에서 18구의 유해를 추가로 발굴했을 뿐이다. 그 이유는 학살지가 깊은 산골짜기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유해가 묻혔다고 추정되는 지역은 도로로 포장되거나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약 7,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희생자 중 그나마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508명에 불과하다.
‘빨갱이’ 낙인 찍힌 가족과 친인척들도 희생자
오랜 세월 ‘빨갱이’라는 낙인과 연좌제에 의한 불이익이 두려워 희생자 가족과 친인척들은 사실이 알려질까 봐 숨기고 살거나 살던 곳을 떠났다. 아예 희생자의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경우도 많다.
전시에 전투원 및 민간인을 필요 이상의 고통과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전시국제법’이 있다. 동법 인도주의 원칙에 따르면, 전쟁 목적상 필요하지 않은 폭력 행위는 그 종류와 정도를 막론하고 허용되지 않는다.
1950년에는 제네바 4개 협약이 발효되지 않았고 남북한이 협약에 공히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양측 모두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3년
이 넘는 한국전쟁 기간 중 민간인 인권은 없었다. 수감 중인 범죄자라고 해도 민간인은 국제규약에 따라 가석방을 하거나 후방 수감시설로 옮겨야 한다. 양측은 그렇게 조치하는 대신 학살을 택했다. 골령골 학살은 심지어 ‘정부가
국민을 적으로 간주’한 결과였다.희생자의 유가족은 가족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오랜 세월 연좌제’로 인해 납북자, 월북자 가족 등과 함께 사회생활에서 많은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1980년에 비로소 8차 개정 헌법 제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항목에따라 연좌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한동안 나아지지 않았다. 아직도 빨갱이라는 이름은 무시무시한 공격력이 있다.
9월부터 40일 일정으로 본격 유해 발굴
참혹한 인권유린이 단지 전쟁 중이었다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 속에는 뿌리 깊은 인권 경시 풍조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공권력과 신분차별에 의해서, 이후 일제에 의해서, 광복 후 6·25 전쟁 발발까지 공공연히 쉽게 자
행된 인권유린 등 전시가 아니어도 우리나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당연시 됐다. 그것이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극단적으로 폭발했다고밖에 볼 수없다. 평화 시에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라야 전쟁 등 위기
시에도 인권이 존중된다.
최근 산내 골령골 학살은 ‘국가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 규정됐고 행정안전부의 지원을 받아 ‘평화위령공원’으로 조성 중인 가운데 유해발굴이 본격 시작됐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9월
22일 오전 10시 30분 산내 골령골 현장에서 개토제를 열고 유해발굴에 들어가 40일간 일정으로 발굴을 진행했다. 이번 발굴은 사건 발생 70년 만에 국가차원에서 대대적인발굴에 착수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땅에서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철저한 조사와 발굴을 통해 희생자들의 인권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글 조강숙 (대전인권센터 시민기자) 사진 윤기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