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 티치아노, 1534~1536년, 캔버스에 유채
‘… 레오나르도 선생, 피렌체에 안주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선생이 오셨을 때 제 초상을 드로잉한 것을 보여주면서 언젠가 채색을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선생이 이곳으로 오셔야만 약속을 이행할 수 있기 때문에 현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그래서 선생이 약속하신 초상을 완성하는 대신 열두 살 가량의 어린 예수의 그림, 말하자면 성전에서 성서학자들과 함께 계신 모습을, 선생 예술의 특징인 매력적이고 온화한 분위기로 그려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시고 제가 선생에게 제안하는 금액에 만족하신다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이사벨라 데스테 초상 의뢰 고사한 다 빈치
이 공손한 편지의 주인공은 만토바 후작부인 이사벨라 데스테(1474~1539)였다. 그녀는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쟁투를 벌였던 근세기 이탈리아의 여러 제후들 중에서 메디치 가문 못지않게 손꼽히는 권세가인 데스테 가문 출신의 여인이었다. 현재는 만토바 가문에 출가하여 궁정문화의 후원자로, 남편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여느 권력자 못지않은 정치력을 발휘하여 정세를 장악해온 여장부이기도 했다. 이런 대단한 여인이 이토록 공손한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당대에 예술가로서 누렸던 지위를 실감케 해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 빈치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주저했다. 이리저리 바쁘다는 이유로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이 제안을 고사하고 말았던 것이다.(덕분에 현재는 작품을 그리기 위한 드로잉만 남아있다)
다 빈치는 결코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가 아니었다. ‘르네상스의 여인’으로도 불렸던 이사벨라를 모델로 모나리자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는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화와 같은 작품을 남겼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만 남긴 채 이 초상화 주문은 여기서 끝을 맺었다.
당시는 예술가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던 시대였다. 오로지 후원자의 주문과 호의에만 기대서 예술가들이 살아가던 시대였다. 물론 작품 창작의 자유도 없었다. 예술가들은 교회가 주문하는 종교화 혹은 정부기관에서 주문하는 공공미술 아니면 이사벨라 같은 부유한 귀족이나 상인들이 주문하는 초상화 같은 개인 소장용 작품들만 제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예술가가 자유롭게 창작하고 그의 개성과 감성이 담긴 작품을 만든다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 빈치가 보인 행보는 오로지 ‘거장’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는 점에서 이 에피소드는 후세의 미술 애호가들에게 적지 않은 호기심을 자아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다 빈치는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그리는 걸 거부했던 것일까?
이사벨라 데스테의 측면 초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 1599년경, 종이에 목탄과 파스텔,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사벨라의 지나친 간섭으로 주문을 고사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에게 있어서 가장 큰 난제는 바로 주문자의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내는가에 있었다. 주문자가 만족하는 것만큼 근사하게 그려내면서도 주문자를 꼭 닮아야 한다는 것.(사실 대부분 주문자의 외모는 평범할 수밖에 없는데 자기 외모를 평범한 모습 그대로 그려달라고 거액을 주는 경우는 결코 없으니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초상화 제작에는 모델을 서는 주문자의 간섭이나 요구가 많았다. 화가는 초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부터 목걸이나 반지 같은 장신구나 모자는 어떤 것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인물의 배경은 어디로 할 것인가 하는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주문자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다 빈치는 당대의 유행을 따라서 이사벨라의 옆모습을 그렸다. 이는 고대 로마의 황제들 초상 양식을 따른 것으로, 로마의 동전에 새겨진 황제들의 모습이 옆모습인 것을 보고 이러한 권위를 따르고자 했던 당시 지배계층들의 요구 사항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이사벨라에 대해서는 완전 옆모습이 아닌 상체는 측면으로 얼굴만 옆모습으로 그렸다. 이와 같은 표현은 다 빈치가 초상화를 그리면서 확립한 독특한 방식으로 상체와 얼굴의 움직임을 다르게 묘사함으로써 인물이 갖는 순간적인 자연스러움을 효과적으로 포착해내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처럼 밑그림만 남은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두고 다 빈치의 의도를 추측하기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이사벨라가 보낸 편지에 다 빈치가 어떤 답장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현재로서 추정할 수 있는 건 이사벨라의 간섭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이에 거부감을 느낀 빈치가 결국 주문을 고사해버렸을 거라는 것 정도인데, 대체 그녀의 요구가 어느 정도였기에 그가 아예 붓을 놔 버리겠다고까지 결심한 걸까?
이에 대해 한 가지 추정할 만한 단서는 있다. 바로 다른 화가가 그린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화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이사벨라는 생전에 누렸던 명성과는 다르게 남긴 초상화나 초상 조각이 별로 많지 않다. 그 초상들이 분실된 건 세월에 따른 유실보다는 생전에 그녀 자신이 없애버렸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이사벨라는 자신의 이미지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이러한 까다로운 요구를 마침내 충족하여 그녀를 진심으로 기쁘게 한 작품을 그려낸 화가는 바로 티치아노였다.
우르비노 공작 부부의 초상,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70년경, 나무 패널에 유채, 우피치 미술관 소장
티치아노가 그린 이사벨라 초상화
티치아노 베칠리오(1490~1576)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베네치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려한 채색의 명인이었다. 다 빈치가 살아있는 듯한 생생한 자연스러움으로 대상을 재현해내는 데 천재였다면 티치아노는 진기한 동방의 염료로 색채를 마음껏 표현한 진정한 색채의 천재였다. 그가 라파엘로를 대신해서 그린 ‘아리아드네를 만나는 바쿠스’ 같은 작품에서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색채 감각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작품의 가격을 높게 매겼으며. 부호들만을 위해서, 관대하게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고 싶어했다.…그의 초상화는 실물을 능가할 정도로 탁월하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모두 왕이거나 황제, 교황, 제후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다. 베네치아에서 주교나 왕, 귀족들 중에 티치아노의 화실로 작품을 구경하러 가지 않거나,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지 않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티치아노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통해 그가 얼마나 명예욕이 큰 사람인지 혹은 어떤 의미로는 얼마나 성공한 화가였는지 추정할 수 있다
그가 그린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보자. 사실 이 작품은 작품 자체로는 무난한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머리에 쓴 터키식 터번이 다소 이국적인 느낌을 줄 뿐 가슴에 두른 모피(오로지 귀족만이 두를 수 있는 것으로 그녀의 높은 지위를 상징한다)의 풍성한 털이나 입고 있는 소매의 섬세한 자수 등 당대 초상화의 양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없어 보인다. 인물의 표현도 당시 유행하던 측면 자세로 지체 높은 귀부인의 품위에 걸맞게 그려졌는데 다소 경직된 자세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 정도만 눈에 뜨일 뿐이다. 사실 이 작품 자체만 봐서는 어떤 점이 이사벨라의 마음을 끌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이 그려질 시기에(1534~1536) 그녀의 나이가 이미 60을 넘었다는 사실이다.(참고로, 다 빈치가 이사벨라의 주문을 받았을 당시 그녀 나이는 25세 무렵이었다)
노부인을, 젊다 못해 채 스물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녀로 그린 것은 누구의 의도일까? 어느 평론가의 말대로 티치아노는 과연 그녀에게 젊음을 선사했던 것일까? 이 어처구니없는 일화는 당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처해있던 상황을 상당히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다 빈치도 거장이었지만 티치아노 역시 당대에 모자랄 것 없는 거장의 지위에 있었던 화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씁쓸한 일화는 예술가가 어떤 경지에서 거장으로 불리는가를 극적인 대비로 보여준다. 누군가는 거부를 통해서 얻는 명성을, 누군가는 극단적인 추구를 통해서 얻기도 한다는 것을.
글 김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