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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방구석 미술관/레오나르도 다 빈치 '암굴의 성모'

2021.12
  • 등록일 : 2021-11-29
  • 조회수 : 1323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다 빈치, 1483년, 나무판에 유채, 높이 199cm, 너비 122cm, 파리루브루 박물관


다 빈치, 경건한 종교화 주문 받다
1483년 4월 25일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밀라노의 ‘무염시태(성모의 원죄없는 잉태) 형제회’로부터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 예배당의 제단화 주문을 받아 계약서에 사인을 했
다. 이 계약서는 현재에도 남아있는데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왕관을 쓴 마리아가 예수를 데리고 황금 제단에 앉아 있을 것, 두 예언자가 나올 것, 하늘에서 푸른색과 금색으로 차려입은 하느님이 그들을 바라볼 것, 두 천사가 나올 것, 그리고 모든 이에게 후광이 비칠 것….’
계약서만 봤을 때는 평범한 종교화의 도상이 그려지는 제단화였다. 형제회는 그해 12월 8일 성모 수태일까지 작품을 완성해 달라고 기한을 정했는데, 8개월밖에 안 되는 촉박한 시간이었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다 빈치는 그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8개월 뒤, 완성된 작품을 보고서 형제회의 수사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요구했던 사항들 즉, 하느님과 두 예언자, 천사 하나, 왕관, 후광이 쏙 빠졌을 뿐 아니라 심지어 아기 예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풀밭에 앉아 있었다. 형제회 수사들을 더욱 당혹하게 한 것은다 빈치의 그림 자체가 가진 기괴한 분위기였다.
훗날 ‘암굴의 성모’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원죄 없는 잉태를 기념하는 성화는 어두운 동굴을 배경으로 성모와 아기예수 그리고 역시 아직은 어린 아기인 세례 요한과 그의수호 천사 우리엘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이 어린 시절에 예수를 만났다는 일화는 성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외경에만 나오는 이야기인데 다 빈치는이 일화를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형제회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사안인데, 다 빈치는 성모와 천사 우리엘의 수수께끼 같은 손동작 그리고 아기 예수와 세례 요한의 기묘한 위치 문제(성모 곁에 있는 아기가 예수가 아닌 요한이라는 것)까지 더해서 작품의 의도 자체를 오리무중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다 빈치가 그린 건 기이한 도상의 종교화오늘날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과감한 예술적 도전이고 명작 탄생의 순간이었지만 작품을 주문한 형제회로서는 더없이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다 빈치는 처음부터
계약서대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진짜 사건은 다음에 일어났다. 형제회의 항의에 시달린 다 빈치는 그림을 납품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위약금을 지불하고 계약을 파기해 버렸던 것이다. 놀랍게도 계약서의 사항을 하나도 지키지 않은 다 빈치는 충실하게 계약을 이행하느니 아예 작품을 안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는데, 사실 다 빈치가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었던 데에는 그동안 그가 밀라노에 체류하면서 신하로서 봉직하고자 했던 권력자 루도비코 스포르차(1451~1508)의 호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밀라노의 2대 공작이었던 스포르차는 그의 궁정에서 봉직하고 싶다고 요청하는 다 빈치의 군사적, 기술적 제안에 대해서는 별 반응을 보이지않다가 별안간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이 눈에 들었던 것인지 다 빈치의 이 작품 ‘암굴의 성모’를 높은 값에 구매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면 일은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던 걸까?

유감스럽게도 결코 아니었다. 형제회에서 계약 불이행을 이유로 다 빈치에게 소송을 건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였다.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1506년에 내려진 판결은 다 빈치에게 2년 안에 주문받은 그림을 그릴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 이듬해인 1507년에는 다빈치에게 대금이 지불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를 전후로 문제가 된 그림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려 20년 만에 제기된 소송으로 다 빈치는 예전에 저지른 실수를 만회해야만 했던 것이다.그렇다면 다 빈치는 이번에는 형제회에 계약서를 제대로 지킨 그림을 납품했던 것일까?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 1508년, 나무판에 유채, 높이 195.5cm, 너비 120cm, 런던국립미술관


 20여 년만에 다시 그린 그림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답은 놀랍게도 ‘아니오’이다. 1508년을 전후로 해서 다 빈치가 새로 그린 성화 ‘암굴의 성모’는 1483년에 그려졌던 첫 번째 ‘암굴의 성모’와 거의 흡사하다. 다른 것이라고 해야 어린 세례 요한이 십자가를 들고 있는 것과 천사 우리엘의 손짓이 삭제된 것 그리고 성모의 옷 색깔에 푸른색을 칠한 정도에 불과하다(인물들 모두에게 후광이 드리워짐). 형제회가 20년이 지나서도 끈질기게 소송해서 얻은 결과물이 결국은 그대로라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지만 이렇게 일을 결론 짓게 된 데에는 몇 가지 단서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첫째로는 20여 년의 세월 동안 높아진 다 빈치의 위상이다. 밀라노에서 암굴의 성모를 처음 계약할 당시 다 빈치는 갓 서른을 넘긴 한창 나이의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이탈리아를 비롯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왕후장상들이 앞다투어 작품을 주문하는 유럽 최고의 화가 중 하나의 지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암굴의 성모’가 완성됐을 때 정작 작품을 주문했던 형제회는 난색을 표했지만 다른 미술 애호가들은 그 작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다 빈치는 ‘암굴의 성모’로 밀라노에서 화가로서의 큰 명성을 얻었는데 이런 분위기가 형제회의 기조를 바꿔놓았을 수도 있다.
세 번째로는 다 빈치가 제시한 낯설지만 새로운 종교적 도상에 형제회의 수사들이 설득됐을 수도 있다. 다 빈치는 애초에 형제회 측에서 제시했던 성모의 왕관이나 신성한 신의 모습을 아예 삭제하고 천사나 성자도 자신의 의도대로 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된 그림의 배경과 인물들의 손짓과 소품이 종교적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도상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동굴과 기묘한 돌기둥들은 바다가 깎은 자연이 만든 풍경이며 그 자체로 성모의 잉태는 인간이 아닌 자연, 즉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가 담겼다는 것이다. 같은 의미로 동굴 바닥으로 흐르는 물은 훗날 어린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주게 될 것을 암시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세례 요한은 프란체스코 성인과 함께 형
제회의 수호 성인이기도 했던 것.


다 빈치여서 가능했던 ‘파격’
사실 정확한 문헌이 남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이든 추측의 영역이긴 하지만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다 빈치는 자신이 창작하고자 하는 세계관이 뚜렷했으며 자신이 기획한 작품을 주문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대로 엎어버리는 일도 허다했다는 점이다. 다 빈치의 작품 중 유독 미완성이 많은 것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미술가에게 창작의 자유도 없고 미술 작품이 오로지 주문에 의해서만 생산되던 시절에 유일무이하게 다 빈치만이
홀로 이러한 특권을 누렸는데 그는 이 특권을 지키기 위해 놀랍게도 그림 그리는 일을 주업이 아닌 부업으로 삼았다
(다 빈치의 본업은 공연 무대 감독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노트에 기록했던 각종 과학 실험들과 발명품들은 거의 무대 연출에 필요한 것을 실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이런 자세가 그대로 작품에 반영이 되었던지 다 빈치의 그
림에는 새롭게 시도되는 파격적인 도상과 배경이 적지 않은데 이 ‘암굴의 성모’에서도 그런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성모자의 모습이 기존의 엄숙한 모습에서 벗어나 더없이 친근한 부모자식의 모습으로 표현된 점은 필리포 리피의 영향이 크지만 다 빈치는 이에 더해서 아기 예수의 근엄한 모습까지도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바꾸는 파격을 선보였다.게다가 언제나 어른으로 표현되던 세례 요한을 아기 예수의 또래 어린이로 바꾸어 성모의 주변에서 노니는 천진한 아이로 표현한 것은 다 빈치가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암굴의 성모에서 가장 큰 파격은 작품의 배경이 되는 동굴 그 자체다. 물이 가득한 동굴은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며 인물들의 뒤에 마치 기둥처럼 서 있는 거석은 남근처럼 보인다면 너무 과장된 생각일까?
이 작품을 주문한 형제회 수사들이 성모의 원죄없는 잉태를 숭배하는 교단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더없이 아이러니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은유와 비유의표현이 예술의 핵심 아니겠는가. <끝>


그동안 김인희 씨의 ‘방구석미술관’을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김인희(미술사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