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사람이야기

"내 삶은 인생역전 아닌, 러브스토리" 바이올리니스트 차인홍 교수

2021.09
  • 등록일 : 2021-08-25
  • 조회수 : 548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 9살 때부터 재활원에서 생활, 5,000원 짜리 바이올린,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미국 라이트주립대학 교수, 오케스트라 지휘자. 한 사람의 지나온 시간들을 설명하는 문장들이라고 하기엔, 한 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하다.

지난 728일 저녁 대전예술의전당, 차인홍 교수(64)가 오랜만에 지휘봉을 잡고 고향 무대에 섰다. 대전예술의전당이 지난해 4월 장애인의 달을 기념해 기획한 베토벤과 운명무대로, 코로나로 1년 넘게 미뤄지다가 이날 관객들과 만났다. 차 교수는 그가 이끄는 DCMF 신포니에타와 함께 베토벤 교향곡 5운명과 피아노협주곡 5황제등을 연주했고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이재혁이 협연에 나섰다. 차 교수는 베토벤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셋 모두 신체적 장애를 딛고 음악의 길을 걸었다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관객들에게 진정한 용기의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대전출신으로 어려운 가정환경과 소아마비라는 장애를 딛고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명성을 거머쥔 차인홍. 지난 2000년 그가 한국의 장애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의 주립대 음대 교수로 채용되자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그의 일대기를 앞 다퉈 보도했다. 그는 재활원에서 생활했고 공립학교는 다녀본 적이 없으며 24살에 검정고시로 중·고교 졸업자격을 얻은 내가 미국에서 교수로 채용되었으니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기적은 늘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소아마비로 걷지 못했던 9살 소년 인홍은 더 좋은 환경에서 생활하기를 바랐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성세재활원으로 보내졌다. 인홍의 첫 번째 기적은 그곳에서 바이올린을 만난 일이다. 1970년 그가 12살이 되던 해, 서울대 음대 출신의 강민자 선생님이 재활원을 방문해 자원봉사로 바이올린 강습을 진행했고 음악이나 바이올린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인홍은 차츰 바이올린에게서 위로를 받기 시작했고 3년 동안 레슨을 받아 콩쿠르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그는 그래도 그 시기에 나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될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18살이 되던 해 강민자 선생님의 대학후배였던 고영일 전 목원대 교수의 제안으로 재활원 친구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현악 4중주가 꾸려졌고 연주자로서 다양한 무대에 서게 되면서 차츰 이름을 알렸다.



그의 두 번째 기적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일이다. 24살 되던 해, 평소 그를 눈여겨보던 대학 교수의 추천으로 아산재단 후원을 받아 미국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됐고 이후 뉴욕시립대 브룩클린 음대에서 석사학위를,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에서 지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 번째 기적은 아내인 조성은씨를 만난 것이다. 비올라를 전공했던 조 씨는 우연히 차 교수의 연주를 보고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다짐했고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핸드백 하나 들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한인장로교회에서 둘만의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차 교수는 막연히 나는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남들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됐다. 내 인새의 가장 소중한 결실중 하나라고 했다.

네 번째 기적은 2000년 그가 83대의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 교수 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채용된 일이다. 음악인이지만 아내와 두 아들을 둔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는 음악을 그만두고 치과기공을 배워 돈을 벌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던 무렵이었다. 그는 이 시기를 수없이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봤지만 번번이 떨어졌고 휠체어 탄 연주자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절망했던 시간이었다. ”고 고백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주립대 교수 채용 공고를 보게 됐고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바이올린 전공자’, ‘현악4중주 경험자’, ‘지휘를 할 수 있는 자가 자격조건이었다.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된 공고 같았지만, 준비된 이에게만 주어진 기회였던 셈이다.

차 교수는 나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도와주려는 이들을 만났다. 그것이 오늘날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인생은 러브스토리라고 말했다.

나의 지난 삶의 이야기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온 고생담이 아니다. 많은 이들로부터 넘치는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나의 인생은 인생역전이라기보다는 러브스토리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허용주 사진 최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