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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목 대전의 문화유산,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를 소개합니다
  • 담당부서 종무문화재과
  • 작성일 2013-08-14
  • 공공누리 공공누리 이 창작한 대전의 문화유산,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를 소개합니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비상업적 이용가능-변형가능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저작권 정책]을 확인하십시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단재 신채호 저(著) 조선상고사 머리말 중-

 

8월 15일 제68주년 광복절을 맞아 대전에서 가볼만한 곳,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를 소개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는 대전오월드에서 조금 더 안쪽인 중구 어남동(단재로 229번길)에 있습니다.

신채호 선생 생가지는 1991년 대전광역시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됐고, 이듬해 주민 고증과 생가 터 발굴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복원에 착수,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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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중구 어남동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이곳에는 낮은 돌담 안으로 작은 초가집과 아담한 마당이 있습니다. 열 걸음이면 가로지를 수 있는 마당이지만 작은 집 덕택에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두 사람이 누우면 가득 찰 듯한 방에는 어린 시절 신채호 선생이 글공부를 하는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 이곳(당시는 충남 대덕군 정생면)에서 태어났습니다.

7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에게 한학을 배운 신채호 선생은 13세에 사서삼경을 섭렵하며 신동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18세에 성균관에 입학한 신채호 선생은 1905년 성균관 박사에 올랐으나 이미 국운이 기운 모습을 보고는 관직을 버리고 나가 계몽운동을 펼칩니다.

신채호 선생의 어린 시절을 재현한 모습.
[신채호 선생의 어린 시절을 재현한 모습]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사에서 붓을 든 신채호 선생은 일제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며 국민이 국권 회복을 위해 나서야 함을 강한 어조로 펴나갑니다. 그러면서 1907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창립위원으로 활동하고, 1908년에는 기호흥학회에 참가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일찍부터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국민에게 무력감을 심어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해 식민사관적 역사 왜곡을 진행합니다.


이에 신채호 선생은 근대 고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일제의 거짓 역사 기술을 반박하고 국민에게 역사적 자존감을 심어주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를 깊이 연구하며 민족사학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하지만, 1910년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신채호 선생은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울 것을 내다보고 망명길에 오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단재 신채호 선생 동상]

역사를 버리면 민족이 자기 나라에 대한 관념이 없어질 것이니

신채호 선생은 중국 청도와 연해주 등에서 무장 투쟁을 위한 무관학교 설립하는 한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강역인 만주 곳곳을 헤치고 다니며 고대사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계기로 신채호 선생은 중국 유학생 조직 ‘대한독립청년단장에’ 추대됐고, 같은 해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은 그해 9월 임시정부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자 분개하며 임시정부를 떠나게 됩니다. 이승만이 미국에 우리나라의 위임통치를 청원하는 등 독립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며 그의 인물됨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유허비에 새겨진 글귀
[단재 신채호 선생 유허비에 새겨진 글귀]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은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


임시정부를 떠난 신채호 선생은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정진해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 등을 완성하며 우리나라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고, 또 이 무렵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이론을 정립해 역사관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다가 1928년 체포, 징역 10년 형을 받고 뤼순 감옥에 투옥됐다가 광복을 9년 남긴 1936년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신채호 선생은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시체가 왜놈들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을 해서 재를 바다에 띄워달라”고 했지만, 훗날 유해가 수습돼 충북 청원군 낭성면에 묘소가 마련됐습니다.

투옥된 신채호 선생
[일제에 체포된 신채호 선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최근 축구 한-일전 경기장에 우리나라 응원단이 내건 현수막 문구에 대해 일본 측이 ‘정치적 표현’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우리나라 일부 인사들이 일본 측의 주장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해 국민적 공분을 자아냈는데요.

일제 강점기에 맞서 민족혼을 살리려던 격언을 두고 다름 아닌 일본의 주장으로 인해 우리끼리 갑론을박을 벌이는 현실이 이곳에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남동 신채호 선생 생가를 찾는 방문객의 발길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비하면 적잖이 줄었다고 하지만, 뜸해진 방문객의 발길이 역사를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광복절 연휴, 신채호 선생 생가지 잔디밭을 거닐면서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고, 외세에 맞서 싸운 위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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